2007년 3월 21일 수요일

역사시험(歷試)을 주관하는 국사편찬위의 역사 왜곡을 개탄한다 .(박기봉)

번호 451 날짜 2007년 03월 20일 14시 24분 이름 박기봉(beebong) 조회수 19 제목 역사시험(歷試)을 주관하는 국사편찬위의 역사 왜곡을 개탄한다 역사시험(歷試)을 주관하는 국사편찬위의 역사 왜곡을 개탄한다 —<키 워드로 푸는 역시(歷試)>(2007. 3. 13. 중앙일보)의 제5회 연재 글 “삼국사기는 사대적인가?”(국사편찬위원회 김범 편사연구사)란 글을 읽고— 우리의 고대사까지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 정부의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인하여 조선 상고사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저들의 주장을 논파할 수 있는 학문적 연구 성과를 국사편찬위를 비롯한 국사학계에 기대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중국측의 논리를 반박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연구 성과도 국민들에게 제시한 적이 없는 국사편찬위원회는 우리 고대사에 대한 국민들의 고조된 요구에 정면으로 답하는 대신에 <우리 역사상식 많이 알기> 캠페인 성격의 <국사 상식 겨루기(줄여서 역시(歷試)라고 함)> 행사를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그 시험성적을 취업이나 승진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식으로 문제의 본질을 감춰 왔다. 그간 다수 뜻있는 국민들은 국사편찬위가 문제의 본질을 감춤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한 행동을 우려(憂慮)해 왔으나, 어떻든 소위 역사시험(歷試)을 계기로 우리 국민들로 하여금 우리 역사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하는 긍정적인 성격도 있음을 인정하고 침묵해 왔다. 그러나 3월 13일자 중앙일보에 개재된 <키 워드로 푸는 역시(歷試)>의 제5회 연재 글인“삼국사기 는 사대적인가?”(국사편찬위원회 김범 편수사)란 제목의 글은 그 내용이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시에 응하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역사의식을 주입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에 그 내용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필자 김범씨는『삼국사기』 가 사대주의적인 역사서라는 <잘못된> 비판을 받게 된 데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지적하면서,“단재는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1135)을「조선 역사 1000년에서 가장 중요한 자주적 사건」으로 평가하면서, 그것을 진압한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런 견해는 그의 강직한 지사적 이미지와 맞물리면서 너른 공감대를 형성해 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고 단재 선생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왜곡한 글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단재 선생은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 최대 사건>(조선사연구초 제 6편. <조선상고문화사>(비봉출판사) 참조)이란 글에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잘못된 것이고, 그 운동을 추진한 묘청의 행동은 <미친 거동>이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단재 선생이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 최대 사건>으로 규정한 것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해 촉발된 진압전쟁의 결과가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이다. 당시 고려의 정치권력은 자주 독립을 주창하는 화랑파와, 정치적으로는 중립적이지만 화랑파에 경도되어 있던 불교파와, 사대주의를 주장하는 유학파 셋으로 정립(鼎立)되어 있었다. 그런데 묘청이 미치광이처럼 느닷없이 서경 천도운동을 벌임으로써 진압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전쟁의 결과 화랑파와 불교파 인사들이 철저히 숙청당하거나 몰락하고 사대주의를 주장하던 유교파 수령인 김부식이 정치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여 자신의 사대주의(主義)에 맞는 우리의 역사서, 즉 『삼국사기』 를 짓게 되었던 것이다. 김부식이 이『삼국사기』 에서 고조선, 부여, 발해 등 우리 상고 역사의 사적 계승관계와 활동무대를 잘라버리고 우리의 역사적 강토, 역사의 무대를 압록강 이내로 한정시킨 것이 <우리 민족 1천년 이래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던 것이다. 둘째, 필자 김범씨는“일제시대의 관학자들은 실증적 관점에서『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믿기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서로 적대적 관계였던 이들(즉, 일제 시대의 관학자들과 단재 신채호)이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퍽 역설적이다.”고 함으로써 마치『삼국사기』에 관하여는 단재 선생께서 식민사학자들과 일정 부분 그 견해를 같이 하였던 것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오해하도록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하여 많은 사서들을 압수하여 불태우면서도 남겨둔 유이(唯二)한 책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임을 생각하면, 일제에 의한 다른 측면에서의 비판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곧 자주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역사서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셋째, 필자 김범씨는“당시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전제(前提)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그것을 현재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주장은 결국 당시 자주독립과 칭제북벌론(稱帝北伐論)을 주장하던 화랑파 등의 주장은 시대착오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현 불가능한 것을 주장한 것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서, 지면 관계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이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왜곡한 것이다. 한편 이 주장은, 일제에 의해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가 일본을 주인으로 섬기고 조선의 역사를 일제가 요구하는 식민사관에 맞추어 왜곡하는 일에 참여한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전제(前提)였으므로, 이병도를 위시한 식민사학자들을 현재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의 다른 표현일 따름이다. 넷째, 필자 김범씨는“중국사만 잘 알고 우리 역사는 거의 모르는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 편찬하였다는 (삼국사기)‘서문’의 내용이나, 중국과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삼국을‘우리(我)’라고 표현한 사례 등은 매우 주목된다.”라고 하면서 『삼국사기』가 마치 사대주의적인 관점이 아니라 자주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역사서인 것처럼 오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그는“매우 주목된다”라는 매우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사실 『삼국사기』의‘서문’에 나오는 앞의 말은 김부식 자신의 말이 아니고 고려 인종(仁宗)이 김부식에게 사서 편찬을 지시하면서 한 말이다. 결국 김부식은 인종의 의도와 부합되는 역사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대주의적, 유교적 이념에 부합하는 역사서를 쓴 것이다. 그리고 삼국을‘우리(我)’라고 한 것을 가지고 마치 그것이 삼국사기의 자주성을 웅변하는 것이라도 되는 양 말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본의 국왕을 명치천황(明治天皇)이라 적으면서 조선의 국왕은‘우리 왕(我王)’이라고 적는 것이 자주적인가?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서 중국인들조차 예컨대 당 태종을‘上(상)’이라 한 것을 전부‘帝(제)’로 바꾸어 적으면서도 고구려나 신라의 왕은 언제나‘我王(아왕)’이라 바꿔 적는다면 그것이 자주적인가? 당나라와 삼국의 전쟁을 기록하면서 당나라 군대를 주어로 기록하고 삼국의 군대를 객체로 기록하는 것이 자주적인가? 자국의 좋은 점, 미담, 강성했던 일, 적과 싸워 승리하였던 일은 축소 내지 빼버리고 적의 좋은 점, 강한 점을 부각하고 적국의 대장이나 왕을 높이 칭찬하는 것이 자주적인가? 고구려 보장왕의 국가 회복운동을 당나라에 대한‘반란’행위라고 규정하고,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을‘불령(不逞)’으로 표현하는 것이 자주적인가? 일본 국왕을 아직도 그들의 호칭을 따라 우리 국민들까지‘천황(天皇)’이라 부르게 하는 것이 자주적인가? 그 무엇보다도『삼국사기』가 사대주의적 입장에서 쓴 사서라는 증거는, 신라 진덕왕 4년(650년)에 신라가 그때까지 사용해 오던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버리고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사실을 두고 김부식이 평하기를,“구석의 작은 나라로서 천자의 나라에 신속(臣屬)한 자라면 사사로이 연호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법흥왕(法興王)이 멋대로 연호를 지어 부른 것은 잘못이었다.…태종의 꾸지람을 듣고도 그대로 해오다가 이때에 와서야 당나라 연호를 받들어 시행하게(奉行) 되었으니, 비록 잘못을 범하기는 하였으나 그 잘못을 능히 고칠 수 있는 자였다고 할 것이다.”라고 한 말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이밖에 달리 더 긴 말이 필요한가. 차마 우리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기 싫어서 말을 아껴 왔지만, 본인이 큰 충격을 받았던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자치통감과 삼국사기를 대조해 가면서 읽다가 삼국사기가 우리나라 최초의 표절의 책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었다. 많은 부분에서 중국의 사서를 갖다 놓고 그대로 옮겨 적다가 중국의 사서가‘고려왕’이라 적은 것은‘아왕(我王)’,‘고려’라고 적은 것은‘고구려’또는‘우리나라(我國)’라고 하는 정도의 개자(改字)만 해놓은 것이『삼국사기』였던 것이다. 끝으로 국사편찬위원회와 김범 편수사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지금 우리 국민들이 갈망하고 있는 것은 잃어버린 우리 역사의 회복과 우리의 고대사를 훔쳐가려고 광분하고 있는 중국측에 대응할 수 있는 학문적인 이론의 제시이지, 우리의 역사 일반, 특히 중세와 근현대사에 관한 단편적인 역사 지식 공부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의 역사에서 고조선사와 부여사, 발해사 등을 잘라내 버리고 우리 상고사의 배경을 압록강 이내로 축소하고 중국에 대하여는 철저히 사대주의적인 자세로 일관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면서 이것이 자주적인 입장에서 쓴 역사서라고 우기는 한, 그리고 우리의 상고사를 잘라 없애버리고 단군을 신화로 치부해 버린 일제 식민사관과 그 연구 방법론으로 동원되었던 이병도류의 실증사학—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전혀 실증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연구하고 있다—을 고집하는 한, 국사편찬위원회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하여 끝까지 항변 한 마디 할 수 없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한 이병도의 여러 제자 학자들은 하루 빨리 종래의 태도를 고쳐서 우리 국민들의 정신을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역사 회복운동에 앞장서 주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의 상고사를 훔쳐가려는 중국인들의 망상을 깨뜨릴 수 있는 역사 연구에 힘써 주기를 바란다. 잃어버렸던 땅을 되찾은 지가 이미 60년이나 지났는데, 잃어버렸던 우리의 역사는 언제나 되찾으려 하는가. 2007. 3. 20.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 (단재 신채호 저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의 옮긴이)

댓글 없음: